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가 있는 안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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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가 있는 안견미술관

by →다솜네텃밭 2018.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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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은 조선초기 세종부터 세조때까지 활동한 화가이다. 그는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가까이 섬겼으며 그의 의뢰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조선초기부터 중기까지 그의 화풍을 이어받은 화가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조선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산수화에 특히 뛰어났고 초상화·사군자·의장도 등에도 능했으며, 그의 화풍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무로마치 막부 시기의 수묵화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현재 그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그림은 몇 점 있으나, 정확히 그의 그림으로 확정된 것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유일하다.

안견의 생애

안견(安堅 ?-?)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의 본관은 지곡(池谷)이고, 자는 가도(可度)·득수(得守), 호는 현동자(玄洞子)·주경(朱耕)이다. 다만 그가 세종 때 도화원(圖畵院) 종6품인 선화(善畵)에서 체아직(遞兒職)인 정4품 호군(護軍)으로 무리하여 승진한 것을 보면 그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고, 또 세종이 그를 얼마나 총애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화원이었던 탓인지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안견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세종이 안견에게 궁중의 의전절차 등을 기록하는 기록화인 [대소가의장도(大小駕儀仗圖)]를 그리게 하여 이를 책으로 남겨 의장행사 때 참고하도록 하게 했다는 것이 있다. 이후에 그에 대해 언급된 실록의 기록은, 모두 후대의 화원들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안견을 기준으로 그림 실력이 안견만도 못한데 더 높은 벼슬을 하려고 하니 심히 외람되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온다. 안견의 아들 안소희는 과거에 급제까지 했는데도 화원의 아들이라는 신분상의 이유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안견이 일했던 도화원은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한성부 중부 견평방(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안견이 살았던 세종 때는 최고 5품까지 오를 수 있는 관청이었으나, 1471년(성종2년)에 도화서로 이름이 바뀌고 부서가 격하되면서 직접 그림을 그리는 화원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은 종 6품 별제(別提)까지였다. 화원이 오를 수 있는 벼슬자리에 한계가 있다보니 자연히 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신분적으로 양반보다 낮은 사람이거나 혹은 이에 종사하면서 신분이 낮아지거나 하는 경우가 있었다. 안견의 경우도 세종의 총애로 화원이 오를 수 있는 관직 이상을 받았지만, 그 아들에게 화원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것을 보면 신분적으로 차별을 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도화원(圖畵院)의 ‘도(圖)’는 실용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국가 행사의 기록화나, 복식이나 물건을 묘사하여 설명하는 그림을 말하고, ‘화(畵)’는 왕실의 초상화와 같은 인물화나 산수, 화조(花鳥) 등등의 그야말로 회화를 뜻한다. 조선시대의 그림은 양반들이 취미로 그리는 사대부화와 안견을 비롯한 화원들이 그리는 그림으로 나뉘어진다. 사대부들 중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었던 관계로, 화원은 신분적으로는 양반에 미치지 못했지만 양반과 친분을 맺고 교유(交遊)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견 또한 여러 사대부 양반들과 친분을 유지하였고 특히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과는 인연이 깊었다.

 

 


몽유도원도를 그리다

안견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그림은 여럿이 있지만, 안견이 그렸다고 확실시되는 그림으로 현전하는 것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유일하다. 이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기초로 그려졌다. 안견은 안평대군의 후견으로 안평대군이 소장한 중국그림을 많이 보고 공부하여 자신의 화풍을 만들었다. 안견은 중국 북송(北宋) 때의 대표적 화가였던 곽희(郭熙)의 화풍을 토대로 하고 그밖의 여러 가지 다른 화풍을 수용하여 자기 나름의 독특한 양식을 이룩하였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이러한 화풍을 확연히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1447년 안평대군은 꿈에 박팽년과 더불어 복숭아밭에서 노닌 황홀한 꿈을 꾸고 안견에게 이를 이야기해주면서 그림을 의뢰하였다. 이 꿈 이야기는 도연명의 [도화원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들은 안견은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완성하였다. 몽유도원도란 꿈에 복숭아밭에서 논 이야기를 그렸다는 뜻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구도상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현실세계로부터 도원의 선경(仙境)이 펼쳐진다.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그림은 38.7× 106.5cm 비단 바탕의 수묵담채화로 보통의 동양화 두루마리와는 다르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개되고 있다. 왼쪽은 현실세계이고 오른쪽은 꿈 속의 도원세계인데 현실세계는 평평하고 완만하게 그렸고, 도원의 세계는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산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전개되고 있다. 현실세계는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린 듯한 느낌이고, 왼편의 도원세계는 위에서 바라보는 듯한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려져있다.

그림에는 안평대군의 발문부터 김종서,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서거정, 최항, 이개, 성삼문 등 당대 최고의 사대부 20여명의 찬문(칭찬하는 글)이 친필로 붙어있다. 이로 인해 이 [몽유도원도]는 그림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조선초기 문인들의 문학과 서예적 성취를 알게 하여 그 역사적 가치도 매우 높다.


이 작품은 조선초기 시, 서, 화의 정수를 결집한 작품으로 평가되며 한국화의 원형으로 조선시대 회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조선초기 학자인 성현은 이 작품을 두고 ‘그림이 신묘한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몽유도원도]는 현재 우리나라에 없고 일본의 덴리대학에서 소장 중인데 언제 일본으로 건너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에 탈취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안견의 영향

안견이 죽은 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세조 초기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견은 당대에 가장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그를 따르는 화가들이 많아서 조선후기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안견의 화풍을 따른 화가로는 양팽손, 신사임당, 김시, 이정근, 이흥효 등이 있었다, 이들 안견파의 특징은 산을 크고 웅장하게 표현하고, 인물이나 동물을 작게 그렸다. 그들은 몇 개의 흩어진 경치와 사물을 조합해 구성하는 방식을 선호하였고, 자연의 묘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붓놀림에 있어서도 필체가 드러나는 것을 감추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 그림들은 대부분 사실화라기보다는 중국의 산수를 상상하여 그리는 상상도가 많았다. 안견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후기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등장 때까지 이어졌다.

한편, 안견의 그림은 일본의 화단에도 영향을 주었다. 무로마치 막부의 화가이자 선승이던 슈우분(周文)이 1423년 대장경판을 하사받기 위한 일본 사절에 참여하여 조선으로 와서 4개월간 머무는 동안에 안견의 산수화를 보고 이를 배워간 것이다. 슈우분이 그린 [죽재독서도] 등은 안견의 화풍과 매우 흡사하다. 슈우분의 그림은 이후 그 화풍이 그의 제자들에 의해 답습되어 무로마치 막부 시기 산수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안견의 화풍이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미친 것이다.

출처:네이버 지식인

 

 

몇년전에 다녀온 충청남도 지곡에 위치한 안견미술관입니다

언덕위에 아담하게 위치해잇고 주차장도 완비해

놓았더군요.

공기도 말고 주변 에는 산도있고요

주말이나 한가한시간에 들러서 구경하고,

가까은 곳에 생길포도 있으니,

식사는 거기에서 하면 별 무리없을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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